서귀포 모슬포 평야 속 전쟁의 기억, 알뜨르비행장 지하벙커 탐방기

서귀포시 대정읍 평야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드넓은 초지 한가운데 묘하게 어두운 입구들이 보입니다. 그곳이 바로 제주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일제 지하벙커입니다. 늦가을 오후, 하늘이 낮게 드리워진 날에 찾았는데, 들판 위로 부는 바람이 차가웠습니다. 주변은 평화로운 들녘이지만, 그 속에는 전쟁의 흔적이 고요히 남아 있었습니다. 넓게 펼쳐진 들판 아래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벙커 입구를 마주하자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그 어둠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듯했습니다. 지금은 국가유산으로 보존되어 있지만, 한때 이곳은 공습과 폭격의 공포가 실재했던 전쟁의 공간이었습니다.

 

 

 

 

1. 들판 끝, 벙커로 향하는 길

 

알뜨르비행장 지하벙커로 가는 길은 대정읍 하모리에서 시작됩니다. 내비게이션에 ‘알뜨르비행장 지하벙커’를 입력하면 군사용 활주로가 있던 평야 중심으로 안내됩니다. 입구는 도로에서 살짝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 표시판을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주변에는 낮은 돌담과 억새밭이 이어져 있고, 차량은 인근 공터에 주차가 가능합니다. 도보로 이동하는 동안 발밑의 흙길이 부드럽게 느껴졌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들판이 출렁이는 듯 움직였고, 멀리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평온한 풍경이지만, 이 고요함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알고 나면 한 발 한 발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입구 근처에는 안내문과 경고 표지가 함께 세워져 있었습니다.

 

 

2. 어둠과 철이 남긴 내부의 풍경

 

벙커 내부는 생각보다 깊고 넓었습니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통로는 좁지만 길게 이어졌고, 곳곳에 작은 방처럼 분리된 공간이 있었습니다. 천장은 아치형 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일부 구간은 물기가 스며 흙냄새와 녹의 냄새가 섞여 있었습니다. 벽면에는 당시 공사용 흔적이 남아 있고, 전선이 지나갔던 자리의 자국도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손전등을 비추면 돌가루가 반짝이며 흩어졌습니다. 내부는 인위적인 조명 없이 어둠이 짙었고, 발소리가 벽에 부딪혀 여러 번 울렸습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이곳은 군수물자 저장과 비행기 정비용 시설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오래된 공간임에도 그 구조가 놀라울 만큼 단단했습니다. 공기마저 무게를 가진 듯했습니다.

 

 

3.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 전하는 이야기

 

알뜨르 지하벙커는 1940년대 후반,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말기에 건설한 군사시설입니다. 전략 요충지였던 제주 남단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이곳의 터널을 파냈다고 합니다. 안내판에는 당시의 상황이 사진과 함께 기록되어 있었고, 벽면 일부에는 노동자들의 도구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거친 흔적을 바라보니 단순한 군사유산이 아니라, 시대의 고통을 품은 장소임을 실감했습니다. 벙커의 입구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끝없이 이어진 평야가 펼쳐집니다. 그 평온한 풍경이 오히려 역설처럼 느껴졌습니다. 인간이 만든 상처가 자연 속에서 이렇게 조용히 묻혀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4. 탐방 공간과 보존 관리

 

지하벙커 주변은 출입이 제한된 구역과 일반 관람이 가능한 구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공개된 구간은 안전 데크와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비교적 안정적으로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일부 구간은 붕괴 위험이 있어 울타리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입구 근처에는 해설 안내소가 있어 예약 시 해설사와 함께 탐방할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들으며 걷다 보면 단순히 ‘옛 벙커’가 아니라 전쟁의 시스템이었던 공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안내소 옆에는 음수대와 벤치가 마련되어 있으며, 전시관에는 당시 알뜨르비행장의 항공지도와 사진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관리가 꼼꼼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보존의 목적이 단순히 기록이 아니라 ‘기억을 전하는 것’임을 느꼈습니다.

 

 

5. 알뜨르 일대와 함께 둘러볼 만한 코스

 

벙커를 관람한 후에는 바로 인근의 알뜨르비행장 격납고와 송악산을 함께 둘러보았습니다. 두 장소는 차로 5분 거리라 이동이 편했습니다. 격납고는 들판 위에 남아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로, 벙커의 위쪽과 연결된 위치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송악산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날씨가 맑으면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오후에는 모슬포항으로 이동해 바닷가를 따라 걷는 것도 좋았습니다. 전쟁의 흔적이 남은 공간에서 바다의 평화를 마주하는 순간이 묘한 대비를 이뤘습니다. 알뜨르 일대를 하루 일정으로 천천히 돌아보면, 제주가 품은 역사와 자연의 층위를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6. 방문 전 알아두면 좋은 점

 

지하벙커는 일부 구간의 조명이 약하므로 손전등을 지참하면 좋습니다. 여름에는 내부가 서늘하고 습도가 높아 미끄럽기 때문에 운동화 착용이 필수입니다. 입구 주변은 바람이 강하므로 겉옷을 챙기는 것이 좋습니다. 관람 시간은 30분 정도이며, 예약을 통해 해설과 함께 둘러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또한 주차장은 무료지만 공간이 좁아 주말보다는 평일 오전 방문이 한적합니다. 내부에서 큰 소리를 내거나 플래시를 과하게 사용하는 것은 자제해야 합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일부 통로가 폐쇄될 수 있으므로 사전 확인이 필요합니다. 어두운 터널 속을 걷는 시간은 짧지만, 나오는 순간 느껴지는 바람과 햇살의 대비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마무리

 

제주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지하벙커는 전쟁의 흔적이 남은 채 세월 속에 묻혀 있는 역사 공간이었습니다. 차가운 돌벽과 희미한 빛 사이를 걷는 동안, 인간이 만든 어둠과 자연의 평온이 동시에 느껴졌습니다. 이곳은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역사를 담고 있는 장소였습니다. 다시 찾는다면 봄의 들꽃이 피는 시기, 그 대비 속에서 평화의 의미를 더 깊이 느끼고 싶습니다. 고요하지만 묵직한 시간의 울림이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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